어릴 때 온몸에 물집이 잡혀 며칠 동안 학교도 못 가고 긁적였던 기억, 바로 '수두'입니다. 며칠 푹 쉬고 딱지가 떨어지면 우리는 "아, 이제 다 나았다! 면역 생겼으니 다신 안 걸리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수두 증상은 사라졌지만, 바이러스는 결코 우리 몸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녀석들은 우리 몸의 면역 군대가 닿지 않는 깊숙한 신경뿌리 속에 숨어, 무려 수십 년 동안 죽은 듯이 잠을 잡니다. 그러다 우리가 늙고 지쳐 면역력이 약해지는 순간, 아주 끔찍한 모습으로 다시 깨어납니다. 바로 '대상포진'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오늘은 한 지붕 아래 사는 두 가지 질병, 수두와 대상포진의 끈질긴 악연을 파헤쳐 봅니다.
1. 한 놈이 두탕을 뛴다: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VZV)
이름은 다르지만, 수두(Chickenpox)와 대상포진(Shingles)을 일으키는 범인은 동일범입니다. 바로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Varicella-Zoster Virus, VZV)'입니다.
이 바이러스가 처음 우리 몸에 들어오면 전신에 가려운 물집을 만드는 '수두'가 됩니다. 주로 면역 경험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걸리죠. 우리 몸의 면역계가 열심히 싸워 바이러스를 제압하면 피부의 물집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패잔병이 된 바이러스들은 죽는 대신 살길을 찾아 도망칩니다. 어디로 갈까요? 바로 우리 척추 근처에 있는 '신경절(Nerve Ganglion)'이라는 동굴 속입니다. 바이러스는 이곳에서 DNA 상태로 숨죽인 채 기나긴 '잠복(Latency)'에 들어갑니다.

2. 수십 년 뒤의 역습: 면역이 약해지면 깨어난다
바이러스는 신경절 속에서 10년, 20년, 심지어 50년 넘게 잠을 잡니다. 우리 몸의 감시병(면역 세포)들이 쌩쌩할 때는 감히 나올 생각을 못 하죠. 하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어 노화가 오거나, 과도한 스트레스, 피로, 혹은 항암 치료 등으로 면역력이 뚝 떨어지면 상황이 바뀝니다.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바이러스는 잠에서 깨어납니다(재활성화). 그리고 자신이 숨어있던 신경 줄기를 타고 다시 피부 쪽으로 내려옵니다. 이때는 예전처럼 전신으로 퍼지는 게 아니라, 그 신경이 연결된 특정 부위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포진입니다. 즉, 대상포진은 남에게 옮아서 걸리는 병이 아니라, 내 안에 있던 적이 반란을 일으키는 병입니다.
3. 띠 모양의 물집과 칼로 베는 듯한 통증
대상포진(帶狀疱疹)의 '대상'은 '띠 모양(Belt-like)'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몸의 신경은 척추에서 나와 띠처럼 옆으로 뻗어있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신경을 타고 올라오면 피부에도 정확히 그 신경 분포를 따라 한쪽 방향으로만 길게 물집이 잡힙니다.
문제는 통증입니다. 바이러스가 신경 자체를 갉아먹으며 올라오기 때문에, 환자들은 "바늘로 찌르는 것 같다", "불에 타는 것 같다", "칼로 베는 것 같다"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합니다. 이를 '통증의 왕'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치료가 늦어지면 피부가 나은 뒤에도 신경 손상이 남아 평생 통증에 시달리는 '대상포진 후 신경통'이라는 무서운 합병증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부에 물집이 잡히고 아프다" 싶으면 72시간 내(골든타임)에 항바이러스제를 먹어야 합니다.

수두와 대상포진은 '한 번의 감염, 두 번의 질병'을 보여주는 바이러스의 가장 극적인 생존 전략입니다. 다행히 이제는 수두 백신뿐만 아니라 성인을 위한 대상포진 백신도 나와 있습니다. 50세 이상이라면 예방접종을 통해 내 안의 시한폭탄을 미리 해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수두 바이러스가 신경에 숨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나요? 그런데 신경에 숨는 녀석이 또 하나 있습니다. 피곤하면 입술에 물집이 잡히게 만드는 단순포진(헤르페스)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가지고 있다는 이 흔하고도 귀찮은 불치병(?), '111. 단순포진 1형(HSV-1): 피곤하면 찾아오는 입술의 불청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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