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무리해서 야근을 하거나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어김없이 입술 구석이 간질간질하고 따끔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보기 흉한 물집이 잡히죠. 우리는 흔히 "피곤해서 입술이 텄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피로의 흔적이 아닙니다. 사실은 당신의 몸속에 숨어 살던 바이러스가 "주인님, 지금 면역력 바닥났어요!"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피곤함의 상징이자 입술의 불청객, '단순포진 바이러스 1형(HSV-1)'의 정체를 낱낱이 파헤쳐 봅니다.
1. 전 국민의 절반이 보균자? (나도 모르게 된 감염)
놀랍게도 단순포진 바이러스는 성인 인구의 60~80%가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매우 흔합니다. "어? 나는 입술에 물집 잡힌 적 없는데?"라고 하실 수 있지만, 감염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증상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증상 없이 바이러스만 가지고 있는 '무증상 보균자'입니다.
이 바이러스는 주로 어릴 때, 바이러스를 가진 가족과의 가벼운 접촉을 통해 감염됩니다. 할머니나 엄마가 아이가 예쁘다고 뽀뽀를 하거나, 찌개를 숟가락으로 같이 떠먹는 식문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옮겨오죠. 한 번 우리 몸에 들어온 HSV-1은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룬 수두 바이러스처럼, 이 녀석도 평생 우리와 함께 사는 '동거'를 택합니다.

2. 얼굴의 신경 속에 숨어 사는 세입자
그렇다면 평소에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요? 수두 바이러스가 척추 신경에 숨는다면, 입술을 담당하는 단순포진 바이러스는 귀 옆쪽 얼굴 깊숙한 곳에 있는 '삼차신경절(Trigeminal Ganglion)'이라는 곳에 숨어 있습니다.
평소에는 우리 몸의 면역 세포들이 이 신경절 입구를 지키고 있어서 바이러스가 꼼짝 못 하고 잠복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야근, 음주, 스트레스, 자외선 노출 등으로 면역력이 떨어지면,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바이러스가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신경 줄기를 타고 쭉 내려와 입술 피부에 도달한 뒤, 세포를 터뜨리며 물집을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재발(Recurrence)'입니다. 여성들의 경우 생리 기간에 호르몬 변화로 인해 재발하기도 합니다.
3. 불치병이지만 관리는 가능하다
안타깝게도 현대 의학으로도 단순포진 바이러스를 우리 몸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약은 아직 없습니다. 한 번 감염되면 죽을 때까지 신경절에 데리고 살아야 하는, 말 그대로 '불치병'인 셈입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이러스 증식을 억제하는 약은 있으니까요. 입술이 간질거리는 초기(골든타임)에 약국에서 파는 '아시클로버(Acyclovir)' 연고를 바르거나 병원에서 항바이러스제를 처방받아 먹으면, 물집이 커지는 것을 막고 회복 기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최고의 치료제는 '휴식'입니다. 입술 물집은 우리 몸이 보내는 "제발 좀 쉬어!"라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입술에 생기는 헤르페스 1형은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외관상 보기 싫고 따가운 통증으로 삶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이 헤르페스 가문에는 입술이 아닌, 훨씬 더 은밀하고 민감한 부위를 공격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바로 '성병'으로 분류되어 많은 오해와 고통을 주는 단순포진 2형(HSV-2)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말 못 할 고민, '112. 단순포진 2형(HSV-2): 말 못 할 비밀과 오해'에 대해 솔직하고 정확한 정보를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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