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우리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이름 뒤에 붙는 H1N1, H3N2 같은 암호가 바이러스의 겉옷에 붙은 단백질 종류를 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H와 N은 단순히 멋으로 달고 다니는 장식이 아닙니다. 바이러스가 우리 몸을 점령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치명적이고 정교한 양손 무기죠.
하나는 굳게 닫힌 세포의 문을 여는 '침투조'이고, 다른 하나는 증식을 마친 후 세포를 탈출하는 '탈출조'입니다. 오늘은 이 완벽한 콤비 플레이를 펼치는 독감 바이러스의 두 가지 핵심 무기, 헤마글루티닌(H)과 뉴라미니다아제(N)의 작동 원리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침투조 'H': 세포를 낚아채는 갈고리 (헤마글루티닌)
바이러스 표면을 현미경으로 보면 뾰족한 못처럼 생긴 돌기가 빽빽하게 박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헤마글루티닌(Hemagglutinin, HA)입니다. 전체 표면 단백질의 약 80%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많고 중요한 무기입니다.
이 H 단백질의 역할은 '강력한 접착제'이자 '갈고리'입니다. 우리 호흡기 세포 표면에는 '시알산(Sialic acid)'이라는 당 성분이 마치 털처럼 덮여 있는데, H 단백질은 이 시알산을 기가 막히게 인식해서 꽉 움켜쥡니다. 일단 갈고리(H)가 시알산(수용체)을 무는 순간, 바이러스는 세포 표면에 딱 달라붙게 되고 스르르 세포 안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감염의 서막을 여는 것이죠.

2. 탈출조 'N': 끈을 자르는 가위 (뉴라미니다아제)
세포 안으로 들어간 바이러스는 수천, 수만 마리로 복제되어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세포 표면에 있는 시알산이 끈끈이처럼 새끼 바이러스들의 발목을 잡아버리는 겁니다. H 단백질이 시알산을 너무 좋아해서 생기는 부작용이죠. 이대로라면 바이러스들은 밖으로 퍼지지 못하고 뭉쳐서 죽게 됩니다.
이때 등장하는 해결사가 바로 뉴라미니다아제(Neuraminidase, NA)입니다. N 단백질은 H와 정반대로 '가위' 역할을 합니다. 바이러스가 세포 밖으로 나갈 때, 발목을 잡고 있는 시알산 연결고리를 '싹뚝' 잘라버립니다. 덕분에 갓 태어난 바이러스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옆에 있는 싱싱한 세포들을 찾아 다시 감염 여행을 떠날 수 있죠. 우리가 독감에 걸렸을 때 먹는 치료제 '타미플루'가 바로 이 N(가위)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약입니다. 가위가 고장 난 바이러스는 세포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갇혀 죽게 되는 원리입니다.
3. 끝없는 변신: 198가지의 경우의 수
인플루엔자가 무서운 이유는 이 H와 N이 수시로 옷을 갈아입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자연계에서 발견된 H는 18종류(H1~H18), N은 11종류(N1~N11)입니다.
이론적으로 이 둘을 조합하면 198가지(18 x 11)의 서로 다른 독감 바이러스가 나올 수 있습니다. 게다가 같은 H1N1이라도 해마다 미세하게 얼굴을 바꾸는 '소변이(Drift)'를 일으킵니다. 작년에 온 도둑(H1N1) 몽타주를 외워뒀는데, 올해 점 하나 찍고 나타나면 우리 면역계(경찰)는 못 알아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년 새로운 독감 백신을 맞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과학자들은 매년 유행할 것 같은 H와 N의 조합을 예측해서 백신을 만드는데, 이 예측이 빗나가면 그해 독감이 대유행하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H는 들어갈 때 쓰는 갈고리, N은 나갈 때 쓰는 가위입니다. 독감 바이러스는 이 두 가지 도구를 아주 능숙하게 다루며 인류의 방어막을 뚫어왔습니다.
자, 이제 바이러스가 어떻게 우리 몸을 침투하고 탈출하는지 그 교묘한 수법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침투당한 우리 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단순히 열만 나는 게 아니라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픈 이유는 뭘까요? 다음 글에서는 독감의 시그니처, '053. 인플루엔자 A의 증상과 병리: 왜 감기보다 훨씬 아플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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