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는 누구일까요? 히틀러? 징기스칸? 아닙니다.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입니다. 그중에서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찾아온 불청객은 전쟁으로 죽은 군인보다 훨씬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스페인 독감'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감염되었고, 최소 5천만 명에서 많게는 1억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재앙이었죠. 이 끔찍한 학살의 주범이 바로 오늘 우리가 파헤칠 '인플루엔자 A형(Influenza A)'입니다. 매년 겨울 우리를 찾아오는 독감 바이러스가 어떻게 세상을 초토화시킬 수 있었는지, 그 서늘한 정체를 알아보겠습니다.
1. 독감 계급도: A형, B형, C형 중 'A'가 왕인 이유
병원에서 독감 검사를 하면 "A형 독감입니다" 혹은 "B형 독감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크게 A, B, C형(최근 D형도 발견)으로 나뉘는데, 이 중 인류에게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일으키는 녀석은 오직 A형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B형이나 C형은 주로 사람 사이에서만 돌고 돕니다. 변이 속도도 비교적 느려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죠. 하지만 인플루엔자 A형은 다릅니다. 이 녀석은 사람뿐만 아니라 새(조류), 돼지, 말 등 온갖 동물들을 숙주로 삼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터집니다. 새들끼리 돌던 바이러스와 사람 바이러스가 돼지 몸속에서 만나 섞이면,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괴물 바이러스가 탄생합니다. 이것을 '항원 대변이(Antigenic Shift)'라고 부릅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2009년 신종플루 모두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A형 인플루엔자였습니다.

2. H1N1? H5N1? 암호명 해독하기
인플루엔자 A형 뉴스를 보면 항상 뒤에 알파벳과 숫자가 붙습니다. H1N1, H3N2, H5N1 같은 것들 말이죠. 마치 암호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바이러스가 입고 있는 옷(단백질)의 종류를 표시한 것입니다.
바이러스 표면에는 두 가지 핵심 단백질이 박혀 있습니다. 하나는 세포 문을 따고 들어가는 열쇠인 '헤마글루티닌(H)'이고, 다른 하나는 증식 후 세포를 뚫고 나가는 탈출 도구인 '뉴라미니다아제(N)'입니다. 현재까지 H는 18종류, N은 11종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바이러스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스페인 독감과 2009년 신종플루는 H1N1 조합이었고, 치사율이 높은 조류 독감은 주로 H5N1입니다. 이 조합의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완벽한 백신을 만들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3. 젊은이들을 노린 죽음의 폭풍: 사이토카인 폭풍
보통 독감은 노약자나 어린아이에게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918년 스페인 독감은 기이하게도 20~30대의 건강한 젊은이들을 주로 쓰러뜨렸습니다. 그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젊은이들의 '너무 튼튼한 면역력'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강력한 바이러스가 들어오자, 젊은 사람들의 면역 체계가 과도하게 흥분하여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자신의 폐 조직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버린 것입니다. 이를 '사이토카인 폭풍(Cytokine Storm)'이라고 합니다. 폐가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물이 차서, 환자들은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하며 질식사했습니다. 인플루엔자 A형이 독한 마음을 먹고 덤비면, 건강하다는 자부심조차 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인플루엔자 A형은 과거의 유물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야생 철새의 몸속에서, 혹은 공장식 축산 농가의 돼지 몸속에서 끊임없이 변이를 일으키며 '넥스트 팬데믹'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년 가을마다 독감 예방 접종을 챙겨야 하는 이유, 그리고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악랄함을 결정짓는 H(열쇠)와 N(탈출 도구)은 도대체 어떤 구조로 생겼길래 그렇게 변신을 잘하는 걸까요? 다음 글에서는 이 두 단백질의 정체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자세히 분석하는 '052. 인플루엔자 A의 H/N 구조 분석' 편으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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