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바이러스는 아주 작다", "광학 현미경으로는 볼 수 없다", "세균보다 훨씬 단순하다"라고 배웠습니다. 이것은 지난 100년 동안 바이러스학의 불문율과도 같았죠.
그런데 2003년, 과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이러스는 무조건 작다"라는 고정관념을 산산조각 낸 괴물이 등장한 것입니다. 세균만큼, 아니 웬만한 세균보다 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이 녀석의 이름은 '미미바이러스(Mimivirus)'. 오늘은 바이러스와 생명체의 경계를 다시 한번 허물어뜨린 이 거인에 대해 이야기하며 '바이러스학 개론' 파트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1. 세균인 줄 알았는데 바이러스라고?
1992년, 영국의 한 병원 냉각탑에서 정체불명의 미생물이 채취되었습니다. 연구진은 현미경으로 이 미생물을 보고 당연히 '세균(박테리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기가 약 400~800nm(나노미터)에 달해, 일반적인 바이러스보다 수십 배나 컸고 광학 현미경으로도 보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브래드포드구균'이라는 세균 이름까지 붙여줬습니다.
하지만 10년 뒤인 2003년, 프랑스의 연구진이 이 미생물을 다시 분석하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냅니다. 이 녀석에게는 세균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세포벽이나 리보솜이 없었습니다. 즉, 세균이 아니라 거대한 바이러스였던 것이죠. 연구진은 "세균을 흉내 내는(Mimicking) 바이러스"라는 뜻에서 '미미바이러스(Mimivirus)'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던 "바이러스는 여과지를 통과할 만큼 작다"라는 정의가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2. 유전자도 거대하다: 생물에 더 가까운 존재
미미바이러스는 덩치만 큰 게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유전 정보(게놈)의 양도 어마어마했습니다. 보통 바이러스는 유전자가 고작 10개 내외, 많아야 100개 정도입니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유전자가 9개밖에 안 되죠.
그런데 미미바이러스는 무려 1,000개 이상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중에는 단백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번역(Translation) 관련 유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바이러스는 단백질을 만들 능력이 없어 무조건 숙주 세포의 공장을 빌려 써야 하는데, 이 녀석은 "나도 맘만 먹으면 장비 챙길 수 있어!"라고 시위하듯 자체 부품을 일부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바이러스가 과거에는 독립적인 생명체(세포)였을 수도 있다는 '세포 퇴화설'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3. 바이러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다? (바이로파지)
미미바이러스의 발견은 또 다른 기이한 현상으로 이어졌습니다. 덩치가 크다 보니, 이 미미바이러스 몸속에 기생하는 '더 작은 바이러스'가 발견된 것입니다.
이 꼬마 바이러스의 이름은 '스푸트니크(Sputnik)'라고 지어졌습니다. 스푸트니크는 미미바이러스가 아메바를 감염시켜 만든 공장을 가로채서 증식합니다. 즉, "바이러스도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죠. 과학자들은 이렇게 바이러스를 잡아먹는 바이러스를 '바이로파지(Virophage)'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생물이고 어디까지가 무생물인지, 그 경계가 정말 흐릿해집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거대 바이러스를 세균, 고세균, 진핵생물에 이은 '제4의 생물 영역'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미미바이러스의 발견은 인간이 알고 있는 바이러스의 세계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바이러스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완벽한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들이 끊임없이 진화하며 우리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바이러스의 정의부터 기원, 분류, 그리고 최신 발견까지 [1부: 바이러스학 개론]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제 바이러스라는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히시나요?
다음 시간부터는 본격적인 실전입니다. 인류를 괴롭혀 온 악명 높은 녀석들을 하나씩 검거하여 심층 분석하는 [2부: Pathogen Archive - 인류를 위협하는 적] 시리즈가 시작됩니다. 그 첫 번째 타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살인마, '051. 인플루엔자 A: 스페인 독감의 주범'입니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Virology 101: 바이러스학 개론 (The Basics) > 1-1. 바이러스의 정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바이러스도 '족보'가 있다? ICTV 분류 체계 아주 쉽게 이해하기 (0) | 2025.12.18 |
|---|---|
| 코로나19? SARS-CoV-2? 도대체 누가 이름을 짓는 걸까? (0) | 2025.12.17 |
| 바이러스(Virus)와 비리온(Virion), 도대체 뭐가 다를까? (1) | 2025.12.17 |
| 바이러스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풀리지 않는 기원 미스터리) (0) | 2025.12.16 |
| 세포의 문을 따는 만능열쇠, '스파이크 단백질(Spike Protein)' (0) | 2025.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