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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ology 101: 바이러스학 개론 (The Basics)/1-2. 침투와 복제

숨만 쉬어도 감염? 전염력 끝판왕 '홍역'의 귀환

by V-Analyst 2025. 12. 21.

"홍역을 치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몹시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쓰는 말이죠. 이 속담이 생겨난 이유는 명확합니다. 과거에 홍역은 누구나 한 번은 걸려야 하고, 걸리면 죽을 만큼 아픈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신의 개발로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홍역이 최근 전 세계적으로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우리가 지난 몇 년간 공포에 떨었던 코로나19조차 명함도 못 내밀 만큼, 홍역은 압도적인 전염력을 가진 괴물이라는 사실을요. 오늘은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옮는다는 '공기 중의 암살자', 홍역 바이러스의 무서운 실체를 파헤쳐 봅니다.

 

 

1. 스치기만 해도 옮는다: 감염 재생산지수(R0)의 제왕

전염병의 전파력을 나타내는 수치로 '감염 재생산지수(R0)'가 있습니다. 확진자 1명이 몇 명에게 병을 옮기는지를 나타내는 숫자죠. 독감의 R0는 보통 1~2, 초창기 코로나192~3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홍역은 얼마일까요? 놀라지 마세요. 홍역의 R0 값은 무려 12~18입니다. 환자 1명이 나타나면 주변의 12명에서 18명을 감염시킨다는 뜻입니다. 이는 인류에게 알려진 바이러스 중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홍역은 무거운 비말(침방울)이 아니라 가벼운 '에어로졸' 상태로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닙니다. 환자가 기침하고 방을 나간 지 2시간이 지나도, 그 방에 들어온 사람은 공기에 남아있는 바이러스를 마시고 감염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숨만 쉬어도 옮는" 수준이죠.

2시간 동안 공기에 떠 있는 홍역 바이러스
2시간 동안 공기에 떠 있는 홍역 바이러스

 

2. 입안에 핀 소금꽃: 코플릭 반점과 발진

홍역의 초기 증상은 감기와 매우 비슷합니다. 고열, 기침, 콧물, 결막염(눈 충혈)이 나타나죠. 그래서 의사들도 초기에 진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발진이 피부에 나타나기 1~2일 전, 입안 볼 안쪽 점막에 좁쌀만 한 희고 붉은 반점들이 나타나는데, 이를 '코플릭 반점(Koplik spots)'이라고 합니다. 마치 빨간 점막 위에 하얀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은 모습이죠. 이 반점이 보이면 100% 홍역입니다. 이후 새빨간 발진이 귀 뒤에서 시작되어 얼굴, , 팔다리로 번져나가며 온몸을 뒤덮습니다. 이때 열은 40도까지 치솟고 환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3. 기억을 지우는 바이러스: 면역 기억 상실(Immune Amnesia)

홍역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을 '포맷(초기화)' 시켜버린다는 점입니다. 이를 '면역 기억 상실(Immune Amnesia)'이라고 부릅니다.

홍역 바이러스는 우리 몸의 기억 세포(과거에 앓았던 병이나 백신 정보를 기억하는 세포)를 공격하여 죽여버립니다. , 홍역에 걸리고 나면 예전에 맞았던 다른 백신의 효과나, 어릴 때 앓아서 생긴 면역력이 싹 사라져 버립니다. 홍역이 낫더라도 몸은 무방비 상태가 되어, 이후 몇 년 동안 다른 사소한 감염병에도 쉽게 걸리고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홍역은 MMR 백신(홍역-볼거리-풍진) 접종을 통해 아예 걸리지 않는 것이 유일하고도 확실한 생존법입니다.

면역 기억을 지우는 홍역의 후유증
면역 기억을 지우는 홍역의 후유증

 

홍역은 단순히 "피부에 뭐 좀 나는 병"이 아닙니다. 공기를 타고 날아와 폐렴과 뇌염을 일으키고, 기껏 쌓아 올린 면역 시스템마저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질환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 암살자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높은 백신 접종률 덕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홍역이 전염력의 제왕이라면, 다음 소개할 녀석은 얼굴을 퉁퉁 붓게 만들어 밥도 못 먹게 하는 고약한 녀석입니다. 어릴 때 한 번쯤 들어보셨을 '볼거리' 기억하시나요? 다음 글에서는 '102. 볼거리(Mumps): 내 얼굴이 사각형이 된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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